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코스 카잔차키스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1883년]], 당시 [[오스만 제국]]령이던 [[크레타]] 섬의 칸디예(قنديه / Kandiye, 현 이라클리오·Ηράκλειο)에서 태어났다. 이후 그는 아테네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으며, 이후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[[앙리 베르그송]] 등의 영향을 받았다. 그리스로 돌아온 이후, 그는 당시 배운 철학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데 많은 노력을 투자하였다. [[1914년]] 그는 당시 그리스의 대표 시인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(Άγγελος Σικελιανός, [[1884년]] [[3월 28일]] ~ [[1951년]] [[6월 19일]])를 만났고, 2년간 [[동방정교회]]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켈리아노스의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. 카잔차키스는 [[1911년]] 갈라티아 알렉시우(Γαλάτεια Αλεξίου, [[1881년]] [[3월 8일]] ~ [[1962년]] [[11월 17일]])와 결혼하였으나, [[1926년]] 이혼한다. 다시금 [[1945년]] 엘레니 사미우(Ελένη Σαμίου, [[1903년]] [[4월 30일]] ~ [[2004년]] [[2월 18일]])와 결혼하였다. 그는 오랜 기간 많은 곳을 여행하였는데, 키프로스, 이집트,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심지어는 [[중국]]이나 [[일본]]도 다녀간 적이 있다. 특히 카잔차키스는 [[소비에트 연방]]을 많이 방문하였는데 이때의 여행문을 '러시아 기행'이라는 글로 남겼다. 러시아 기행에는 카잔차키스가 이상적인 공간으로 바라보는 소련의 모습이 그려져있다. 이를 보면 한때 그가 [[블라디미르 레닌]]의 영향을 받았고 외세에 포위당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몰두하는 소련을 지지했던 것이 분명하다.[* 이와 관련해서, 카잔차키스가 폴란드인 친구에게 소련의 유토피아적인 사회상을 전해주자 폴란드인 친구는 [[포템킨 마을]]의 일화를 인용하여 소련이 외부에 보여주는 이미지와 실제 실상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냉소하는 대화가 러시아 기행에 소개되어있다.] 하지만 공산주의 사상을 확고하게 가진 적은 없고, 오히려 [[스탈린]]의 등장 이후 환상이 깨졌던 것으로 보인다. 이렇게 공산주의적 사고를 거쳐가면서 초기에 그를 이끌었던 민족주의적 사상은 보다 범민족적인 이상주의로 옮겨가게 된다. [[1945년]], 그는 작은 비 공산주의 좌파 정당의 지도자가 되었고, 그리스 정부의 내각 일원으로 활동하였다. 그러나 바로 그 다음 해 바로 그 자리를 사임하였다. [[1946년]]부터 그리스 작가 연합은 카잔차키스와 시켈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에 추천하였고 그는 총 아홉 차례에 걸쳐 후보에 올랐다. 그러나 정작 표결에 올랐을 때 그는 한 표 차이로 [[노벨상]]을 놓쳤다.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는 [[알베르 카뮈]]였다. 카뮈는 나중에 말하길,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"수백 배는 더 이 영예에 마땅하다"고 하였다. [[1957년]], 그는 [[백혈병]]을 앓는 와중에도 [[중국]]과 [[일본]]에 다녀왔으나, 돌아오는 길에 독일 [[프라이부르크]]에서 병이 악화되어 쉬는 중 생을 마감한다.[* 잠시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 [[알베르트 슈바이처]]가 찾아오기도 했다. 열린책들에서 나온 <그리스인 조르바> 작가 연보 참조.] 그의 무덤은 고향인 [[이라클리오]]의 성문 근처에 있는데, 이는 동방정교회가 그의 무덤을 묘지 안에 두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. 그의 비석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다. >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.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. >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.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>나는 자유다. Είμαι λέφτερος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